요즘 “용팔이 맞을래요?”에 관한 글이 참 많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용산에서 여러 덤태기나 불성실한 직원들의 대우에 불만을 가지신 분들이 이번을 기회로 그에 대한 불만을 한꺼번에 토로 하시는 것 같다.

어릴적 용산도 많이 이용해 봤고 테크노마트도 여러번 이용해 봤지만 아무래도 덩치와 인상이 있었기에 그렇게 심한 대우는 받은 기억이 없다. 지금이야 “누가 맞을래요?” 하면 “네 맞을래요.” 하고 다 맞은 다음 경찰서로 끌고가 깽값 받아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어쨌든 이러한 나에게도 아픈 추억이 하나 있다.

제목에서 언급한 세팔이.. 짐작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는 세운상가에서 물건을 덤태기 씌우는 악덕상인을 일컷는 말이다.

지금이야 온라인시장 확대 및 상권변화로 세운상가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내가 어렸을 적 즉 1990년 후반까지만 해도 세운상가는 온갖 전기,전자관련 상품 및 일반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게임 및 여러 컨텐츠가 모여있는 큰 시장이었다.


당시의 세운상가의 모습
출처 : 한겨레 21

참고 : 음란물, 유통망이 바뀐다 (한겨레21 1999년 3월)

 

나 같은 경우는 당시에 참으로 게임을 좋아한지라 동대문 만물시장과 함께 게임팩을 바꾸기 위해 자주 들렸던 곳들 중 하나였는데 가끔 동대문에서 싸게 매입한 팩이 세운상가에 가면 비싸게 인식되어 금액차가 큰 팩과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일본 게임잡지였던 패미통 등의 잡지도 싼값에 살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자주가다 보니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슬슬..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야한 비디오들.. 가끔 팩을 바꾸러 가면 내 또래의 아이들이 어떤 아져씨와 함께 건물내부로 들어가 잠시 후에 벌건 얼굴이 되어서 검정비닐에 둘러싸인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는데 알고보니 그런건 대부분 그런 비디오였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꼭 봐보고 말리라.’
하는 결심으로 열심히 게임을 즐기며 세월아 네월아하는 도중 대망의 그날이 왔다.

때는 설날.
큰 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심지어 형, 누나라고 부르는 모는 친척분들에게 때로는 진실되게 때로는 억지로라도 새배를 하고 고이고이 모아둔 거금 3만원. 땀으로 모은 노동의 결정체였다.

이미 이것으로 무얼할지는 정해져있었기에 나는 고민할 것 없이 설 휴가가 끝나자 마자 바로 53번 버스를 타고 세운상가로 향했다.

1시간 정도에 걸친 기나긴 여정(사람이 기대에 차있으면 같은 거리도 길게 느껴진다)을 마친 끝에 도착한 세운상가. 그동안의 목적이었던 게임팩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은 두근두근 거리고 아져씨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거 있는데 한번 볼래?”
“좋은거요?”
“응.. 좋은 거야.”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오히려 그러한 호객행위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지나처 버리고..

잠시간의 고민 끝에 마음을 잡고 다시금 다른 곳을 둘러보니 또 다른 아져씨가 불러세웠다.

“너 비디오 사러왔지?”
“네!?”
“너 비디오 사러왔잖아~ 그치?”
“네….”
“잠깐만 있어봐.”
“네……….”

아무말도 못하고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아져씨가 검정비닐에 둘러쌓인 네모난 물체를 전해주었다.

“4만원만 네”
“네..? 그렇게 비싸요?”
“너 얼마있는데?”
“3만원요”
“흠.. 그럼 그것만 내라. 이 아져씨가 특별할인해서 준거다”
“네.. 고맙습니다.”
“부모님께 걸리지 말고 잘봐~”
“네~”

손에 들어온 까만 물체.. 그걸 내 손에 넣은 것 만으로도 너무 기뻤던 나는 몰래 속에 무었이 들었는지를 확인해봤다.

제목은 “동물의 왕국”
‘아.. 아져씨들이 이런거 팔다가 걸리면 불법으로 잡혀가서 이런 테이프에다가 복사해서 파는 거구나’
하고 그들의 상술에 나름 감탄했다.

집으로 가는 또다른 한시간의 여정은 정말로 길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속력으로 데쉬~ 도착하자마자 TV와 비디오를 켜고 가슴이 터질듯한 기대로 재생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거리는 화면이 조금 흘러간 후 익숙한 공익광고 화면이 떴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법비디오들을 시청함으로써..’

아.. 상당히 찔렸다.
완전히 내 이야기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언넝 본편이 시작되길 마음에 FF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펼치진 장대한 자연 풍경.
드넓은 초원에 사자 몇마리가 노닐고 있고 어디선가 들은적이 있는 목소리가 사자들의 생태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해 주시고 있었다.

‘음.. 그래 좀 있으면 나올꺼야.’

그렇게 20분이 넘게 열심히 사자의 생태에 대해서 시청하고 있었으나 이게 왠일인지..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러다 정말로 끝나는거 아니야? 이거 혹시 정말 동물의 왕국인거야?

결과는?
정말 동물의 왕국이었다.
아프리카의 초원위에 지는 석양의 붉은 빛과 함께 테이프는 끝나고 또 지지직 화면만이 줄기차게 지나갈 뿐이었다.

잠시 멍해있던 나..
정신을 차리고 나니 마음은 당장에 테이프를 구매했던 곳으로 쫒아가 뭐라뭐라 하고 싶었으나 그게 될리가 없다. 첫째로 무서웠고 둘째로는 잘못했으니 벌을 받은거야라는 후회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로는 세운상가에 오로지 팩만 바꾸러 갔다.
아져씨들이 아무리 불러제껴도 들은 척도 안하고 말이다.

뭐.. 나름 아픈 추억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추억조차도 소중하다. 너무나도 순진했던 나.. 이제는 그런 종류의 컨텐츠를 마음만 먹으면 수 없이 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이 되었기에 그때의 추억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얼마 있으면 이런 추억들이 담긴 세운상가가 철거된다. 몇 년 있으면 전에 볼 수 없었던 멋진 건물이 들어서겠지. 그리고 나와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을 마음속 한켠에만 담아두겠고 말이다.

그때 내게 “동물의 왕국”이란 감명깊은 비디오를 안겨주셨던 세팔이 아져씨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시고 계실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글의 관련글

Tags:

2 Comments

  1. 불과 8~9년여전 제 친구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장소는 조금 틀린 청계천이었는데요, 비디오 떨리는 맘으로 트니까 의천도룡기가 나오더랍니다..그래서 다시 찾아가서 바꿔달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그런 경우도 가끔있으니 미안하다면서 순순히 바꿔주더랍니다. 그리고 집에와서 다시 틀어보니 이번엔 동물의 왕국…이 끈질긴 제 친구놈은 나름대로 머리큰 중3이었던지라 다시 한번 찾아가게됩니다. 그러자 그 아저씨 왈..또 바꿔주면서 “한번만 더 찾아오면 죽여버린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를 줬겠거니 했지만 집에가서 틀어보니 역시나 다른 비디오였다고 하네요 허허 ^^;;

    1. 친구분의 용기가 부럽습니다.
      그리고 동물의 왕국은 참 여러곳에서 취급하는 군요..^^

      그리고 아져씨도 참 끈질기시네요.
      왠만하면 제대로 된 컨텐츠 좀 주시지.

      말씀 고맙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